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사카 마사노부 (문단 편집) == 상세 == 젊었을 때 이름은 카스가 토라츠나(春日虎綱)[* [[일본어 위키피디아]]에서는 [[https://ja.wikipedia.org/wiki/%E6%98%A5%E6%97%A5%E8%99%8E%E7%B6%B1|문서 표제가 이 이름으로 되어 있고]], '코사카 마사노부'는 리다이렉트 처리되어 있다.] 또는 카스가 겐고로, 겐스케(겐노스케)다. [[풍림화산]] 등의 드라마에서 신겐이 '단죠(弾正)'라고 부르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원래 [[다케다 신겐]]의 엘리트 근위 무사 출신으로, 최초 출사는 1552년 아시가루 대장. 그리고 그 능력을 인정받아, 1556년에는 우에스기가와의 접경 지역이자 최전선인 카이즈성(海津城)의 성주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본래 성은 카스가(春日). 하지만 신겐의 [[시나노]] 정복을 전후하여, 시나노의 호족이었으나 우에스기 가문과 내통하여 숙청당한 코사카(高坂) 가문의 양자가 되어 코사카 마사노부로 개명했다. 신중한 성격으로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괴멸시킨 후, 모든 장수가 추격을 주장할 때 유일하게 너무 깊숙히 쫒아가는 것을 피하도록 진언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별명 '후퇴 단죠'의 유래가 된 일화라고도 한다.] 물론 이 당시의 이에야스는 말 위에서 똥을 쌀 정도로 혼비백산하여 실제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으나, 최고의 상황에서도 최악의 돌발 상황을 언제나 대비하였던 그의 성격이 나타나는 일화이다. 세심한 면이 있어서 [[카와나카지마 전투]]에서는 전사자의 피아를 가리지 않고 후하게 장사를 치러줬으며,[* 다케다 가신단의 동료 사이인 무장 하라 토라타네도 비슷한 기사도 정신을 발휘해서 우에스기 군의 부상당한 노장을 손수 간호하고 적진에 바래다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우에스기 측에 인도할 때에도 적극 협조하였다. [[나가시노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으나 다케다의 군세가 대패한 사실을 미리 알고, 패잔병들이 주눅들지 않도록 미리 새 옷을 준비했다가 갈아입혔다. 참고로 이 전투에서 마사노부의 아들 마사즈미도 전사한 상황이었다. [[다케다 신겐]]와는 [[와카슈도]]의 관계였던 듯 하다. 증거로 다케다 신겐이 코사카 마사노부에게 보낸 러브레터가 사료로써 남아있다. 편지 전문은 이렇다. ||1.지금까지 야시치로에게 수작을 건넸던 일은 몇번 있으나, 복통이라는 등 이런저런 구실로 거절당했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2.나는 야시치로와 육체 관계를 맺은 일이 없다. 이전에도 결코 그런 적이 없고, 낮에도 밤에도 그런 일은 없었다. 하물며 오늘 밤 그런 생각은 꿈에도 갖고 있지 않다. 3.'''그대와 맺어지고 싶다고 생각하여 이런저런 손을 쓰고 있는 차에''', 거꾸로 의심을 받으니 안타깝다. 지금까지 한 말에 추호라도 거짓이 있다면, 고슈 제1, 2, 3 대명신,[* 가이에서도 중요하게 꼽히는 3대 신사의 신들을 합쳐서 일컫는다.] 후지, 하쿠산 신사의 신들, 거기에 하치만 대보살, 스와상하명신(諏訪上下明神)에게서 벌을 받을 것임을 신들 앞에 서약한다. 본래대로라면 보인[* 쿠마노 신사에서 발행하는 부적. 쿠마노고오의 세이시('서사')라고 불리는 문서로, 이 문서에 써서 서약한 것을 어기면 천벌을 받아 죽임을 당해 지옥에 떨어진다는 신앙이 있어서 일본에서는 귀천을 막론하고 널리 맹세의 용도로 사용되었다.]에 써야 하지만, 심부름꾼의 눈도 있고 해서 보통의 종이에 써서 보낸다. 내일이 고쳐 써서 보내겠다. - 7월 5일, 카스가 겐노스케에게, 하루노부|| 즉, '''내 맘 속엔 너뿐이다. 걔랑 잔 적 없다.'''라는 서찰을 부하 무장에게 보냈다는 얘기다. 사실 전국 시대에 무사 계급에서 주군과 친위 무사, 가신 간의 성애 관계는 '슈도'라고 불리며 일반시되던 것이라서 당시에는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자세한 것은 중도의 항목을 참조. [[다케다 4명신]] 중에는 상당히 젊은 편으로, [[나가시노 전투]]에서 대패한 후에도 4명신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다케다가 부흥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에게 대응하기 위해, 숙적인 우에스기와의 동맹을 모색해서 성공에 큰 역할을 했다.[* 코에츠동맹(甲越同盟). 그런데 다케다 가문에 실질적인 도움은 거의 되지 않았다.] 동맹이 맺어진 직후인 1578년 6월, 카이즈성에서 병사했다. 다케다 신겐의 군략에 대한 중요한 사료인 '코요군칸(갑양군감)'의 저자라고 알려져 있으나 코요군칸은 사료로서 신뢰성을 의심받는 책이어서 실제 저자인지 후세의 가탁인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다. 여러 대중 매체에서는 위의 동성애 관계 때문에 점차 대놓고 '''섹드립'''에 가까운 묘사가 늘고 있다. 일본의 인터넷에서는 이것 때문에 '후퇴 단죠(逃げ弾正)'를 비틀어서 ''''바텀 단죠(受け弾正)''''라고 불리는 상황. 코사카 가문은 코사카 마사사타(高坂昌定)가 살아남아서 은거했다가 그의 손자인 코사카 마사쿠니(高坂昌国)와 그 형제가 도쿠가와 히데타타의 사생아이었던 호시나 마사유키 이나 우에스기 가문의 가신이 되어서 [[메이지 시대]]까지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